아침에 인터넷으로 한국경제 기사를 보는데 사진 한 장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천장에 원형으로 박힌 에어컨 한 대, 그 아래로 카펫이 깔린 넓은 실내 — 모스크였다. 삼성전자가 사우디아라비아 주요 도시의 모스크 100여 곳에 시스템에어컨 1000여 대를 공급한다는 기사였다. 처음엔 '삼성이 해외에서 또 뭔가 팔았구나' 하고 넘기려다가, 최근 한 달 넘게 매일같이 보던 유럽 폭염 사망 뉴스가 겹쳐 떠올랐다. 그런데 막상 두 뉴스를 나란히 놓고 보니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왜 유럽은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중동은 이미 모스크까지 에어컨을 다 깔아놓은 걸까. 이 질문 하나를 붙잡고 자료를 더 찾아보니, 이건 단순히 '더운 나라에 가전 팔기' 이야기가 아니라 국가별 냉방 인프라의 격차, 그리고 그 격차가 만드는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시장 이야기였다.

1. 같은 폭염, 다른 결과 — 에어컨 보급률이라는 변수
먼저 숫자부터 확인했다. 미국 가정의 에어컨 보급률은 약 90%인 반면, 유럽은 약 20%대에 불과하다. 나라별로 더 벌어지는데,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50% 수준이지만 프랑스는 24%, 그중에서도 북부 지역은 이보다 더 낮다. 북유럽·중유럽은 여름 평균기온이 27도 아래였던 지역이라 에어컨이 오랫동안 '사치품' 취급을 받아왔다는 게 국제에너지기구(IEA) 관계자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올여름처럼 40도가 넘는 날이 몇 주씩 이어지자, 냉방 인프라가 없는 이 지역들이 그대로 인명 피해로 직결됐다. 세계보건기구는 6월 말 폭염으로 유럽에서 1300명 넘게 숨졌다고 밝혔는데, 그중 프랑스에서만 초과 사망자가 1000명을 넘었다. 프랑스 학교 1만3000여 곳, 영국 학교 2000곳 이상이 휴교하거나 수업을 조정했을 정도다.
이 대목에서 처음 생각이 하나 정리됐다. 폭염 자체는 전 지구적 현상이지만, 그게 '재난'이 되느냐 '불편'으로 끝나느냐는 순전히 그 나라의 냉방 인프라 보급률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같은 40도라도 에어컨 보급률 90%인 미국과 20%대인 프랑스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맞는다. 그러니까 삼성의 사우디 모스크 공급 뉴스를 읽을 때도, '더운 나라니까 에어컨을 산다'가 아니라 '이미 냉방 인프라가 깔려 있는 나라와, 이제 막 깔기 시작한 나라'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시장을 구분해서 봐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2. 유럽 — 이제 막 열리는 시장, 그런데 걸림돌이 많다
유럽은 이번 폭염을 계기로 '에어컨 모멘트'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인식이 바뀌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캐리어, 다이킨 같은 HVAC 기업 주가가 이 시기 들썩였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런데 유럽 시장이 그렇게 간단히 열리지는 않을 것 같다. 이유를 찾아보니 세 가지가 겹쳐 있었다. 첫째는 설치 규제다. 파리 같은 대도시에서는 건물 외벽에 실외기를 달려면 주민 동의부터 도시미관 심의까지 최대 7단계 행정 허가가 필요하고, 문화재 보호구역 건물은 실외기 설치 자체가 거부되는 경우가 많다. 둘째는 비용이다. 벽 타공, 배관, 크레인 작업까지 들어가는 유럽식 설치 방식 때문에 설치비만 수백만 원에서 최대 천만 원까지 든다고 한다. 셋째는 에너지·환경 정책이다. 스페인은 공공장소 에어컨 설정온도를 27도 아래로 못 내리게 규정해뒀고, 에어컨이 실외로 뿜어내는 열이 도심 기온을 2~4도까지 끌어올린다는 연구 결과도 있어서 '냉방이 도시를 더 덥게 만든다'는 역설적인 비판까지 나온다.
그래서 지금 유럽에서 실제로 잘 팔리는 건 정식 시스템에어컨보다 이동식 에어컨 쪽이라고 한다. 설치 규제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인데, 문제는 이 저가형 시장을 중국 업체들이 이미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LG전자가 유럽 냉매 규제를 맞추고 소음까지 줄인 이동식 제품을 내놓긴 했지만, 삼성·LG가 이 싸움에 정면으로 뛰어들 이유는 크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국내 업체들은 가정용(B2C) 저가 시장 대신, 신축 건물과 상업 시설을 겨냥한 프리미엄·B2B 쪽으로 전략을 좁히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유럽은 분명 앞으로 커질 시장이지만, 삼성·LG 입장에서는 '누구나 뛰어들 수 있는 대중 시장'이 아니라 '규제를 뚫을 여력이 있는 상업·신축 시장'만 취사선택하는 그림인 셈이다.
3. 에어컨의 역설 — 냉방이 온난화를 다시 부른다
여기까지 정리하고 나니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유럽이 에어컨을 오랫동안 멀리했던 이유 중에는 단순히 '수요가 없어서'만 있는 게 아니었다. 유럽은 재생에너지·탄소중립을 스스로의 정체성처럼 내세워온 지역이고, 그 안에서 에어컨은 오랫동안 '미국식 에너지 낭비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즉 지금까지 유럽의 낮은 냉방 보급률에는 인프라 격차뿐 아니라 환경적 신념이라는 요소도 섞여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번 폭염으로 그 신념이 생존 앞에서 무너지고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에어컨을 켜는 행위 자체가 온난화를 다시 부추긴다는 사실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냉방은 이미 전 세계 전력 소비의 약 10%, 온실가스 배출의 약 7%를 차지한다. 자동차 등 수송 부문 배출 비중(14%)의 절반에 해당하는 규모다. 여기에 에어컨 냉매로 쓰이는 수소불화탄소(HFCs)는 이산화탄소보다 온난화지수(GWP)가 수백~수만 배에 달하는 강력한 온실가스라, 전력 소비 문제와는 별개로 냉매 배출 자체도 기후에 부담을 준다. 올해 2월 국제 연구팀이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에 발표한 논문은 에어컨 사용 증가만으로도 2050년까지 지구 평균기온이 추가로 0.03~0.07도 더 오를 수 있다고 추산했다. 그리고 IEA는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에어컨 보급률이 계속 오르면서 2050년 전 세계 냉방 에너지 수요가 지금의 3배로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정리하면 구조는 이렇다. 온난화가 폭염을 부르고, 폭염이 에어컨 수요를 부르고, 에어컨이 다시 전력 소비와 냉매 배출을 늘려 온난화를 부추긴다. 그리고 이 순환의 다음 차례가 지금 막 냉방 인프라를 갖추기 시작한 지역들, 그러니까 유럽 같은 곳이라는 점이 핵심이다. 이미 에어컨이 포화 상태인 미국이나 중동은 이 배출량이 이미 반영돼 있는 시장이지만, 유럽처럼 보급률이 20%대에서 이제 막 오르기 시작하는 지역은 앞으로 늘어날 배출량 대부분이 새로 추가되는 몫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유럽의 '에어컨 모멘트'는 유럽인들의 생명을 지키는 동시에, 유럽이 그동안 자부심으로 내세워온 저탄소 정체성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딜레마를 유럽이 어떻게 풀어가느냐가, 앞으로 냉방 산업의 방향을 정하는 또 하나의 변수가 될 것 같다.
4. 중동 — 이미 포화된 시장, 그래서 남은 건 '틈새'뿐이다
반대로 사우디를 비롯한 걸프 지역은 애초에 에어컨 없이는 실내 생활 자체가 불가능한 곳이라, 가정용 보급률은 이미 오래전에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니 유럽처럼 '이제 막 침투율을 늘려야 하는' 시장이 아니다. 이 지점에서 왜 하필 삼성이 '모스크'를 택했는지가 이해가 됐다. 이미 집집마다, 상가마다 에어컨이 다 깔려 있는 시장에서 새로 팔 곳을 찾으려면, 아직 냉방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덜 갖춰졌거나 노후화된 공공·종교시설 같은 틈새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모스크는 하루 다섯 번 예배가 있고 방문객 수가 일정하게 보장되는 시설이라, 한 번 계약이 성사되면 유지보수까지 이어지는 안정적인 B2B·B2G 매출원이 된다.
실제로 중동 HVAC 시장 자체가 상업·정부(B2B·B2G) 프로젝트가 70% 이상을 차지하는 구조라고 한다. 가정용 개별 판매보다 정부 조달, 공공시설 입찰이 훨씬 큰 파이라는 뜻이다. LG전자는 미·이란 종전 이후 지정학 리스크가 줄면서 상업·정부 영역 대형 프로젝트 수주에 속도를 내고 있고, 아부다비 학교들에도 냉난방·환기 통합 솔루션을 공급했다. 삼성은 모스크 리노베이션 전문 현지 단체와 협약을 맺고 종교시설이라는 특정 채널을 파고들었다. 결국 유럽이 '아직 안 뚫린 대중 시장'이라면, 중동은 '이미 포화된 시장에서 마지막 남은 조각'을 놓고 삼성·LG가 경쟁하는 구도다.
5. 냉방도 지정학이다 — '메이드 인 사우디'라는 진입장벽
그런데 이 틈새시장조차 아무 기업이나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이 진짜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LG전자가 중동에서 따낸 한 프로젝트에는 사우디 현지에서 생산한 공기조화기가 공급됐는데, 이게 사우디 정부의 '메이드 인 사우디' 정책과 맞물려 평가받았다고 한다. 사우디는 석유 의존도를 낮추고 제조업 기반을 자국 안으로 끌어오려는 국가 전략(비전 2030)을 추진 중인데, 외국 기업이 완제품만 실어 나르는 방식으로는 정부 조달 시장에서 우대받기 어려운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다. 삼성이 모스크 패널에 이슬람 전통 문양을 새기고, 고온·개방형 구조에 맞춘 전용 설계를 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성능 자체는 이미 상향평준화됐으니, 이제 승부는 '그 나라 정부·현지 파트너와 얼마나 밀착돼 있느냐', '현지 생산·현지 문화를 얼마나 반영했느냐'로 넘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이건 반도체나 배터리에서 봐온 '자국 생산 우대'와 본질적으로 같은 흐름이 냉방이라는, 언뜻 정치적으로 무해해 보이는 가전 영역까지 번진 사례로 보인다. 미국이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전기차·배터리 보조금을 받으려면 현지에서 생산해야 한다는 정책)으로 배터리 현지 생산을 요구했듯, 사우디는 정부 조달을 지렛대 삼아 외국 가전기업의 현지 생산·현지화를 유도하고 있는 셈이다. 쉽게 말하면 냉방 업계에도 서서히 국경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냉방 시장이 커지는 것과, 그 시장에 실제로 들어갈 자격을 얻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걸 이번 기사를 통해 다시 확인했다.
6. 두 시장, 하나의 전략 — 가전회사에서 인프라회사로
유럽과 중동은 겉으로 보면 정반대 상황이다. 하나는 이제 막 뚫리는 시장이고, 하나는 이미 포화된 시장이다. 그런데 삼성·LG가 두 시장에서 취하는 전략의 방향은 신기하게도 똑같다. 가정용 저가 대량판매(B2C) 경쟁에는 뛰어들지 않고, 상업·신축·정부·종교시설 같은 B2B·B2G 영역에서 규모가 크고 반복적인 계약을 노린다는 점이다. 실제로 LG전자는 올해 2분기 매출·영업이익 모두 2분기 기준 역대 최대를 기록했는데, 성수기 해외 에어컨 판매 증가와 함께 전장(VS)·B2B 사업의 안정적인 수주 잔고가 실적을 밀어 올린 축이었다. 삼성도 시스템에어컨 시공·자재를 맡는 삼성전자로지텍이 HVAC 통합 유지보수, 빌딩 에너지 진단·운영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고, 지난해 인수한 스웨덴 에너지관리 기업 플랙트그룹과의 시너지도 준비 중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에어컨을 잘 만드는 회사'에서 '건물 하나, 도시 하나의 냉난방·에너지를 설계하고 유지보수까지 책임지는 회사'로 사업 구조 자체가 옮겨가고 있다는 것. 에어컨 한 대를 파는 것과, 모스크 100곳의 유지보수 계약을 따내거나 신축 빌딩 전체의 HVAC 시스템을 통째로 수주하는 것은 매출 규모도, 반복 수익 구조도 완전히 다르다. 폭염이라는 기후 변수가 계절마다 반복되는 이상, 이 B2B 전환은 일회성 실적 개선이 아니라 구조적인 성장 축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7. 투자자 입장에서 정리해보면
이 흐름을 '중동 테마주' 혹은 '폭염주' 같은 단발성 이슈로 좁혀서 보는 건 오히려 방향을 잘못 잡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네 가지를 계속 지켜볼 생각이다. 첫째, 삼성·LG 실적 발표에서 가전 매출 총액보다 HVAC·B2B·구독처럼 반복 수익 성격을 가진 사업의 비중이 얼마나 늘고 있는지. 둘째, 유럽에서 국내 기업들이 저가 대중 시장을 포기하고 프리미엄·상업 시장에만 집중하는 전략이 실제로 점유율로 이어지는지, 아니면 중국 업체에 저가 시장을 완전히 내주는 대신 얼마나 수익성을 방어하는지. 셋째, 중동을 비롯한 신흥 냉방 시장에서 '현지 생산·현지화' 요건이 앞으로 다른 나라로도 확산되는지 여부다. 넷째, 냉방-온난화 악순환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질수록 유럽연합이 냉매·에너지효율 규제를 더 강하게 조일 가능성이 있는데, 이 경우 고효율·저GWP 냉매 기술을 가진 기업이 저가 중국 제품 대비 상대적으로 유리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반도체·배터리에서 봤던 자국 우대 흐름이 가전으로 번지는 초입이라면, 이건 냉방 산업만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리스크도 있다. 중동 정세는 언제든 다시 불안해질 수 있고, 그러면 정부 발주 프로젝트부터 속도가 늦춰진다. 유럽 쪽은 규제와 설치 비용이라는 구조적 장벽이 단기간에 사라지긴 어려워 보인다. 그래도 아침에 무심코 넘길 뻔한 사진 한 장이, 유럽의 사망자 수와 사우디의 산업 정책과 삼성·LG의 사업 구조 개편까지 하나로 이어지는 걸 확인하고 나니, 앞으로는 '오늘 몇 도까지 오른다더라' 하는 뉴스도 그냥 날씨 얘기로만 안 읽힐 것 같다.
직접 읽은 기사
홍민성, "'삼성, 사우디 사로잡았다'…모스크 100곳에 에어컨 공급", 한국경제, 2026.07.19
참고 자료
"살인 폭염 닥친 유럽…왜 에어컨 없을까", ZDNet Korea
"에어컨 거부하던 유럽, 40도 폭염에 고집 꺾었다", 한국경제
"생존이냐 환경이냐…서유럽 최악 폭염에 '에어컨 논쟁' 불붙었다", 뉴스1
"유럽 폭염에도 에어컨이 안 팔리는 이유는?", 에너지뉴스
"미·이란 종전에…LG전자 중동 HVAC 수주 본격화", 헤럴드경제
"사람 살리는 에어컨, 지구는 죽인다…'냉방 딜레마'에 빠진 인류", 에너지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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