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업무 시작 전 한국경제를 넘기다가 A24면에서 눈이 멈췄다. 스마트폰 앱으로 만성기침을 억제한다는 기사였다. 미국 디지털 헬스 기업 하이프가 일본 교린제약과 함께 처방형 만성기침 디지털 치료제 임상을 진행 중이라는 내용인데, AI가 기침을 실시간으로 측정하면서 행동치료를 앱으로 제공한다는 게 골자다. 처음엔 신기했는데, 읽다 보니 익숙한 단어들이 눈에 들어왔다. 디지털 치료제, DTx, 3세대 치료제. 몇 년 전부터 국내에서도 계속 들어본 이름들이다. 그래서 이번엔 그냥 넘기지 않고, 이 산업이 실제로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찾아봤다.
1. 12조 원 시장이라는 전망은 꽤 오래됐다
디지털 치료제는 먹는 알약이나 주사제가 아니라 소프트웨어로 질병을 예방·관리·치료하는 의료기기다. 미국 시장조사기관 얼라이드 마켓 리서치 자료를 인용한 국내 보도에 따르면, 글로벌 시장은 2018년 21억 달러 규모에서 연평균 20% 안팎으로 성장해 2026년엔 96억 달러, 한화 약 12조 원 수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이 전망 자체는 벌써 몇 년 전부터 나온 얘기다. 국내 허가 품목도 2023년 첫 제품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5개까지 늘었다. 다만 작년엔 신규 허가가 10개였는데 올해는 한 개에 그쳤다는 점에서, 허가 건수만으로 산업의 온도를 판단하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정부는 세계 최초로 전용 법까지 만들었다
오늘 기사에서 사실 가장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따로 있었다. 정부가 작년에 디지털의료제품법을 시행하면서 디지털의료기기와 디지털융합의약품에 기존 의약품·의료기기와 구별되는 별도의 허가·안전관리 체계를 도입했다는 내용이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한국이 이런 전용 법을 갖춘 세계 최초 국가라는 평가가 업계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임상시험 설계 가이드라인도 미국 FDA의 소프트웨어 의료기기 가이드라인보다 세분화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제도 인프라 자체는 이미 선진국 수준을 앞서 있다는 뜻인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허가 체계는 세계에서 가장 빨리 갖췄는데, 정작 그 제품이 병원에서 처방되고 돈이 되는 단계로 넘어가는 속도는 정반대로 느리다. 이 간극이 이번 글에서 계속 확인하게 될 핵심 모순이다.
3. 미국에서는 이미 두 번 무너졌다
더 깊이 들어가 보니 미국 쪽 역사가 먼저 눈에 띄었다. 프로테우스 디지털 헬스는 알약에 센서를 심어 복약 여부를 확인하는 스마트필 기술로 한때 1.5조 원 넘는 기업가치를 인정받았던 실리콘밸리의 대표적 디지털헬스 유니콘이었다. 오츠카제약과 손잡고 세계 최초의 디지털 알약 아빌리파이 마이사이트까지 승인받았지만, 2020년 6월 결국 챕터11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국내 보험연구원 리포트는 이 실패의 핵심 원인으로 센서가 내장된 알약 가격이 일반 약보다 훨씬 비쌌던 점을 지목했다. 3년 뒤인 2023년엔 또 다른 대표주자 페어 테라퓨틱스마저 파산했다. 페어는 2017년 미국 FDA로부터 소프트웨어 단독으로는 최초로 허가받은 마약중독 치료 앱 reSET을 만든 회사였는데, 상장 이후 주가가 계속 내려가다 결국 자산을 경매에 넘기는 처지가 됐다.
4. 그 잔해를 사간 회사 중 하나가 한국의 웰트였다
이 대목에서 조금 놀랐다. 페어 테라퓨틱스의 자산 경매에서 네 개 회사가 나눠서 인수했는데, 그 중 하나가 한국의 웰트였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미국 시장에서 가장 먼저 뛰어들었다가 무너진 회사의 자산을,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늦게 시작한 회사가 사들인 셈이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이 됐는데, 최소한 시장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고, 오히려 선두주자의 실패에서 뭔가를 배운 후발주자들이 그 기술과 노하우를 흡수하며 재편되는 국면이라는 쪽으로 정리가 됐다.
5. 국내 1호 상장사는 지금 우주항공 회사가 됐다
한국 쪽 역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국내 디지털치료제 기업 중 최초로 코스닥에 상장했던 라이프시맨틱스는 호흡재활 디지털치료기기와 암환자 예후관리 프로그램을 앞세워 2021년 상장했는데, 상장 첫날부터 가격제한폭까지 밀려 하한가로 거래를 마쳤다. 이후로도 디지털헬스케어 사업은 만성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최대주주가 바뀌면서 우주항공 소재 기업과 합병 절차를 완료했다. 국내 1호 디지털헬스케어 기술특례 상장사라는 타이틀이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진 셈이다. 디지털치료제 회사로 시작해서 우주항공 회사로 끝났다는 점에서, 앞서 본 미국 사례와 묘하게 겹쳐 보였다.
6. 국내 1호 허가 제품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허가 기준으로는 에임메드의 불면증 치료제 솜즈가 국내 1호다. 2023년 허가를 받으며 화제를 모았지만 실제 처방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기대보다 낮았고, 결국 대표이사가 교체됐다. 작년엔 디지털치료기기 사업부를 아예 자회사로 떼어냈는데, 업계에서는 이걸 투자 유치나 매각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보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공개한 자료를 보면 실제 처방 의료기관 수도 솜즈 16곳, 웰트의 슬립큐 6곳, 뉴냅스의 비비드브레인 5곳에 불과했고 이마저 대부분 수도권에 몰려 있었다. 국내 허가 품목이 15개까지 늘었다는 숫자와는 별개로, 실제 현장에서 쓰이는 제품은 손에 꼽는 수준이라는 뜻이다.
7. 진짜 장벽은 결국 가격표에 있었다
가장 구체적인 숫자를 찾은 건 이 대목이었다. 아직 정식으로 건강보험 급여에 등재된 디지털치료제는 없고, 대부분 혁신의료기기 트랙을 통한 임시등재 형태로 처방되고 있다. 그런데 심사평가원이 고시한 임시등재 기준가격은 솜즈 2만 5390원, 웰트 제품 2만 1660원 수준인데 반해, 실제 의료기관에서 청구되는 비급여 가격은 20만 원대로 최대 스무 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업계에서는 이 가격으로는 개발비는커녕 소프트웨어 유지보수 비용조차 감당하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식 등재는 차의과학대 산학협력단 위탁연구를 거쳐 이르면 2026년 말에서 2027년 초쯤 논의될 것으로 보이는데, 결국 이 가격 격차가 얼마나 좁혀지느냐가 산업 생존의 분수령이 될 것 같다.
8. 그래도 이번엔 다를 수 있는 이유
이렇게 실패의 역사를 쭉 훑고 나서 오늘 기사를 다시 읽으니 느낌이 좀 달라졌다. 하이프의 만성기침 치료제나 웰트의 AI 수면 모델이 강조하는 건 예전처럼 정해진 프로그램을 모든 환자에게 똑같이 주는 방식이 아니라, 웨어러블과 앱으로 모은 데이터를 계속 분석해서 치료 전략을 실시간으로 바꾸는 방식이다. 기술적으로는 분명 한 단계 나아간 게 맞다. 다만 프로테우스도 페어도 기술이 부족해서 무너진 게 아니라 가격과 수가 구조에서 발목이 잡혔다는 걸 생각하면, AI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이 제도적인 벽을 대신 넘어주진 못할 거라는 게 지금 드는 생각이다.
9. 그래서 투자자 입장에서는 어디를 봐야 할까
여기까지 정리하고 나니 정작 중요한 질문이 남았다. 이 얘기가 계좌랑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웰트나 에임메드는 아직 비상장이라 개인 투자자가 직접 지분을 살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그런데 찾아보니 우회로가 하나 있었다. 코스피 상장사인 한독(002390)이 2021년 웰트에 30억 원을 투자해 9%대 지분을 확보한 주요 주주라는 점이다. 단순 지분 투자로 끝난 게 아니라, 슬립큐의 국내 유통과 판매전략, 보험급여 확대까지 전방위로 협업하는 구조라 웰트 매출이 커지면 한독도 유통 마진과 지분가치 양쪽에서 걸쳐 있는 셈이다.
다만 이걸 곧바로 '한독 = 디지털치료제 수혜주'로 단순화하긴 어렵다는 게 솔직한 판단이다. 한독 매출에서 디지털치료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미미한 수준이고, 앞서 본 것처럼 슬립큐 실제 처방 의료기관도 6곳에 불과하다. 결국 이 지분이 실제 숫자로 의미를 가지려면 두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하나는 앞서 7번에서 본 임시등재 기준가격과 비급여가의 20배 격차가 정식등재 논의를 거치며 좁혀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처방 의료기관 수가 지금의 한 자릿수에서 의미 있게 늘어나는 것이다. 이 두 지표가 실제로 개선되는지를 확인하는 게, 뉴스 헤드라인 하나보다 훨씬 믿을 만한 신호일 거라고 본다. 참고로 나는 지금 이 업종 종목은 하나도 들고 있지 않다. 오늘은 그냥 기사 하나에서 시작해서 산업의 구조를 뜯어보는 데까지 갔을 뿐이고, 실제로 편입할지는 저 두 지표를 몇 분기 더 지켜보고 판단할 생각이다.
이번엔 그냥 신기한 뉴스로 넘기려다가, 미국 사례부터 국내 1호·2호의 결말까지 찾아보고 나니 생각이 좀 복잡해졌다. 12조 시장이라는 전망은 몇 년째 반복되고 있는데, 그 사이 유니콘 두 곳이 파산하고 국내 1호 상장사는 업종 자체가 바뀌었다. 그렇다고 이 산업이 끝났다고 보진 않는다. 페어의 자산을 웰트가 사갔다는 사실 하나만 봐도, 실패의 경험이 계속 다음 회사로 흡수되며 이어지고 있다는 뜻이니까. 다만 허가 소식이나 CES 혁신상 같은 뉴스 하나에 바로 움직이기보다는, 정식등재 시점과 처방 기관 수 같은 실제 숫자가 움직이는지를 좀 더 지켜본 다음이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디지털치료제 #DTx #디지털헬스 #웰트 #에임메드 #라이프시맨틱스 #건강보험
출처
한국경제, "스마트폰으로 만성기침 치료…'디지털 약' 시대 개막", 2026.08.18(지면 A24), 최지희 기자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6081752971
참고 자료
비즈니스포스트, "'디지털 치료제' 제도는 갖췄지만, 최대 20배 차이나는 비급여 장벽은?"
히트뉴스, "디지털치료기기, 정식등재 위해 단계적 수가 적용 필요"
팜이데일리, "허가 늘어나는 K디지털치료제…비급여·심사 적체는 '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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