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발리의 1인기업, 그리고 포드의 후회
지난 3월 KBS 1TV 《시사기획 창》 '나의 완벽한 비서 - AI 에이전트 시대' 편을 본 적이 있다. 디지털 노마드의 성지로 불리는 발리 현지를 직접 취재해, AI 에이전트만으로 사업을 굴리는 1인기업가들을 보여준 방송이었다. 하루 30분만 일하고 월 매출 1억 5천만 원을 올린다는 보안 전문가 사례가 특히 인상 깊었다. 직원 하나 없이 AI 에이전트만으로 콘텐츠를 만들고, 고객 응대를 하고, 매출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진짜 사람 없이도 회사가 돌아가는구나, 1인기업 시대가 왔구나" 싶었고, 그 인상이 폴라리스오피스 같은 국내 AI 에이전트 관련주를 담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주 금요일(7월 3일)자 조선일보 A10면을 펼치니 정반대 이야기가 나와 있었다. "美 기업들의 후회 — AI 믿고 잘랐던 베테랑 다시 모신다." 포드가 AI로 5000명을 자르고 다시 350명을 채용했단다. 둘 다 AI가 사람을 대신한다는 같은 전제에서 출발했는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 둘을 나란히 놓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 글을 쓰기로 했다.
2. 2020년부터? 시점부터 걸렸다
포드 기사를 자세히 보니 "2020년부터 최근까지" AI를 도입하며 사람을 줄였다고 나온다. 챗GPT가 나온 게 2022년 말인데 시점이 안 맞았다. 뭔가 이상해서 좀 더 찾아봤다. 포드가 공장에 설치한 건 결함을 잡아내는 AI 카메라 900대, 딥러닝 기반 머신비전 검사 시스템에 가까웠다. 이 기술은 국내 업계 자료로 봐도 2020년 무렵부터 이미 제조 현장의 표준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니까 포드가 자른 건 챗봇 같은 생성형 AI가 아니라, 훨씬 오래되고 좁은 의미의 자동화였던 거다. 반면 클라르나(2024년 AI 비서 도입)와 IBM의 '애스크HR'은 진짜 최근 생성형 AI 얘기다. 한 기사 안에 결이 다른 두 세대의 기술이 아무렇지 않게 섞여 있었다.
3. 그런데 세대가 다르다고 결론이 달라지진 않았다
흥미로운 건 기술 세대는 달라도 실패 원인은 똑같았다는 점이다. 포드는 머신비전 카메라가, 클라르나·IBM은 챗봇이 각각 하던 일을 대신했는데, 두 경우 다 사람이 하던 '검증' 역할이 사라진 자리에서 문제가 터졌다. 포드는 카메라가 놓친 결함을 걸러줄 베테랑 검사관이 없어서 리콜이 났고, 클라르나는 챗봇이 처리 못 하는 예외 상황을 받아줄 상담원이 없어서 고객이 떠났다. 여기까지 정리하다 보니 나름의 가설이 하나 섰다. AI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를 가르는 건 사람이 있냐 없냐가 아니라, AI가 만든 결과물을 누가, 얼마나 가까이서 검증하느냐 아닐까 싶었다.
4. 그럼 발리의 1인기업은 왜 되는가
이 가설을 세우고 나니 발리 사례가 다시 이해됐다. 1인기업 대표는 AI 에이전트가 만든 콘텐츠든 응대 메시지든, 매일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직접 책임진다. 검증자와 결과물 사이 거리가 사실상 0이다. 그러니 AI가 실수해도 바로 잡히고, 사업이 무너지지 않는다. 반면 포드나 클라르나는 검증을 담당하던 사람 자체를 조직에서 통째로 들어냈다. 그 빈자리를 채울 사람이 회사 어디에도 남지 않은 채로 AI만 돌아간 것이다. 그러니까 발리에서 본 장면도 틀린 게 아니었고, 조선일보 기사도 틀린 게 아니다. 둘 다 같은 원리의 서로 다른 조건일 뿐이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예측을 더 해보고 싶다. 1인기업도 이 원리에서 자유롭지는 않을 것 같다. 사업이 커지고 처리할 산출물이 늘어나면, 대표 혼자 모든 AI 결과물을 검증할 수 있는 물리적 한계에 언젠가 부딪힌다. 그 시점부터 검증을 나눠 맡을 사람이나 체계를 새로 만들지 않으면, 그 1인기업도 몇 년 뒤엔 똑같이 포드나 클라르나가 겪은 문제를 겪을 수 있다. 그러니 '1인기업 시대'는 영원한 정답이라기보다, "대표가 직접 검증 가능한 규모 안에서만" 성립하는 조건부 현상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5. 이게 개별 회사 얘기만은 아니라는 근거
이 가설이 그럴듯한 건지 스스로도 좀 의심스러워서 자료를 더 찾아봤다. 그러다 MIT 미디어랩 산하 NANDA 이니셔티브가 작년 7월 낸 'The GenAI Divide: State of AI in Business 2025' 보고서를 발견했다. 미국 기업들이 엔터프라이즈 AI에 350억~400억 달러를 투자했는데 95%의 파일럿이 손익에 측정 가능한 영향을 못 냈고 5%만 성과를 냈다고 한다. 숫자만 보면 좀 섬뜩한데, 성공한 5% 기업들의 공통점을 보니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감이 왔다. 자체 개발보다 검증된 외부 벤더와 파트너십을 맺은 경우의 성공률이 67%로, 자체 개발(33%)의 두 배였다. 자체 개발은 처음부터 "이걸 누가 검증할지"까지 조직이 스스로 정해야 하는데, 이미 검증 체계가 갖춰진 벤더 솔루션을 사다 쓰면 그 숙제를 던 채로 시작하는 셈이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 95%라는 숫자를 곧이곧대로 믿기도 좀 그렇다. UC버클리 SCET는 이 수치가 AI 기술의 실패라기보다 기업들의 성과 측정 방식이 아직 못 따라가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는 반론을 냈는데,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6. '조용한 거부'도 같은 얘기다
국내 HR테크 기업 원티드랩(376980) 이복기 대표가 몇 달 전 "AI로 인한 업무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 AI만 도입한 기업들의 성과는 떨어지고 있다"며 "구성원들의 조용한 거부도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고 진단한 걸 본 적이 있는데, 이 틀에서 보니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 좀 더 와닿았다. AI가 업무 과정을 대신하는 순간, 직원이 그동안 자기 숙련도를 증명해오던 방식 자체가 사라진다. 결과물만 남고 과정이 안 보이면 내가 왜 필요한 사람인지 설명할 길이 없어진다.
바로 이 지점 때문에 '업무 재설계'가 AI 도입에서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는 것 같다. 예전 업무 방식에서는 과정 자체가 곧 그 사람의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포드의 검사관은 결함을 잡아내는 안목으로, 클라르나의 상담원은 예외 상황을 풀어내는 순발력으로 자기 몫을 증명했다. AI가 그 과정을 통째로 흡수해버리면, 회사가 의도적으로 새 증명 방식을 설계해주지 않는 한 직원 입장에서는 자기 존재 가치를 보여줄 통로 자체가 사라진다. 그러니 회사가 이 부분을 새로 설계하지 않고 도구만 던져주면, 직원은 대놓고 반발하는 대신 최소한으로만 쓰거나 검증 없이 그대로 넘기며 조용히 발을 뺀다. 결국 검증자가 조직 안에서 스스로 사라져버리고, 이게 다시 리콜과 고객 이탈로 돌아온다. 도구를 새로 들이는 것과, 그 도구가 들어온 자리에서 사람이 무엇으로 자기 몫을 증명할지 다시 짜주는 것은 확실히 다른 일이다.
7. 그래서 어디를 봐야 하나
이 '업무 재설계'를 회사가 스스로 해내지 못한다면, 그걸 대신 설계해주는 쪽에 자리가 생기지 않을까 싶다. 원티드랩의 AX 패키지 '엔노이아'가 여기 해당한다고 본다. 다만 리스크도 같이 봐야 공정할 것 같다. 국내 구인배수는 0.36배로 2001년 집계 이래 최저이고, 원티드랩의 본업인 채용사업 매출도 올해 1분기 63억 원으로 정체돼 있다. 그런데 같은 분기 AX 신사업 매출은 20억 원, 비중은 지난해 20%에서 23%로 올라왔다. 전체 매출은 12.1% 늘고 영업손실은 18.7% 줄었으니, 채용시장이라는 본업이 흔들려도 AX 쪽이 그 공백을 조금씩 메워주고 있는 그림으로 보인다. 다만 AX 매출이 아직 전체의 4분의 1 수준이라, 이것만으로 실적을 완전히 뒤집기엔 아직 이른 것도 사실이다.
신문을 접으면서 다시 든 생각은, 결국 문제는 "AI가 사람을 대체하느냐"가 아니라 "그 결과를 누가 끝까지 확인하고 책임지느냐"였다는 것이다. 발리의 1인기업도, 포드도, 결국 이 질문 앞에 서 있었던 거다. 기사 한 줄, 통계 하나를 그대로 믿지 않고 시점과 출처를 다시 따져본 것도 결국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 확인을 남에게 미루지 않는 것, 그게 결국 내 계좌를 지키는 가장 기본적인 일이라는 걸 이번에도 새삼 느꼈다.
출처: 조선일보 2026.07.03자 A10면, 박지민 기자, "美 기업들의 후회… AI 믿고 잘랐던 베테랑 다시 모신다"
원문 보기
참고: KBS 1TV 《시사기획 창》 '나의 완벽한 비서 - AI 에이전트 시대'(2026.3.17 방영); MIT NANDA Initiative, "The GenAI Divide: State of AI in Business 2025"(2025.7); UC Berkeley SCET 반론 자료; 원티드랩 2026년 1분기 실적 보도(서울경제, 2026.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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